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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역사편        

이 글을 쓰는 본인은 역사를 전공한 사람이 아니다. 이와는 거리가 먼 공학을 전공하는 사람이다. 공과 대학에서 학위를 받기까지 십 년을 공부하였고, 공부가 끝난 후에는 공학계통의 국책연구소에서 이십 년 넘게 근무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의 현대사도 아닌 고대사를 다루어 보겠다고 껍쩍거리고 있으니 우스운 일일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지금까지 많은 고대사전공의 역사학자들이 해석하고 있는 것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말을 뱉어내고 있으니 이것을 읽는 사람들이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나는 꼭 20년 전에 일본 도쿄에 자리잡은 공업대학에 박사후연수과정으로 일년간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 연수 시작 이 개월쯤 지난 나의 환영회 때에 대학원학생들이 역사부도를 가져와서는 「임나일본부」가 지배하고 있던 지역을 가리키며, 옛날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이백여 년 간 통치하였다는 사실을 인식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옛날엔 우리가 일본보다는 선진국으로 모든 문물을 일본에 넘겨주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먼 옛날에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니 내가 잘못 배웠거나 그들이 잘못 알고 있거나 어느 것 중의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연수 중에 하였던 실험은 한 달에 한번 정도 시료를 채취하여 그 시료를 분석하는 것으로, 매일 하는 일은 밤새 실험장치가 잘 돌아갔나를 확인하여 계속되는 실험이 잘 진행되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시료를 채취한 후에 분석을 하기 위해, 분석장치에 며칠동안 붙어 있기도 하였다. 따라서 실험장치가 잘 돌아가고 있는 동안은 책을 볼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실험에 관련된 논문의 대부부분을 국내에서 같은 업무를 하였을 때 읽었기 때문에 다른 책을 읽을 수 있는 여유를 가졌던 것은 나에게 소중한 시간이 되었던 것이다. 이때 읽은 책들은 일본의 고대사에 관련된 서적과 고대 한·일에 관계된 책이 주가 되었다.
이런 책들에는 『임나흥망사』와 같은 단행본이 있어 한반도 남부의 경영에 대하여 상세한 기술이 있기도 하였으나, 일본의 역사를 알면 알수록 일본인들이 잘못된 역사를 가르치고 또 배우고 있다는 생각이 굳어갔다.
일년간의 연수 후에 국내로 돌아온 후에도 일본인이 주장하는 역사왜곡이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를 않았다. 내가 읽은 여러 가지 책으로부터 일본인들이 한·일간 고대사를 이렇게 왜곡하고 있다는 주장을 읽을 수는 있었지만, 명확한 근거에 의한 반박이 약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수년 전에 나라이름, 땅이름, 방위, 관직 등을 이렇게 읽으면 되겠다는 생각이 퍼뜩 떠올라 나를 사로잡았다.

일찍이 양주동 선생은 이두로 우리의 역사서에 기록된 향가를 멋지게 뜻풀이를 하였다. 아마도 일제 시대 때 일본어를 배우게 되면서 한자를 음독과 훈독으로 읽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이 방법 그대로를 우리의 역사서에 한자로 기록된 향가를 읽는데 적용함으로서 새롭고 명확한 해석에 도달하였을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이두」가 어떤 형식으로 쓰였음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같은 역사서에 기록된 것들이 「이두」의 쓰임에 따라 쓰여진 역사적 사실도 있었음을 쉽게 알 수가 있겠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가 갖고 있는 고대사 중에서,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며 시비 거리가 되는 기록문을 한자의 뜻 그대로만 읽는 것이 아니라 이두로 읽기로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지금까지와는 너무나 다른 해석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휘두를 내용을 내뱉게 된 것이다.

그러기에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지금까지 갖고 있던 것에 집착하지 않고, 새로운 눈으로 우리의 역사를 다시 본다는 생각으로 읽어 주기를 바란다.

1. 단군신화
처음 아사달을 이끈 지도자는 누구나 알고 있듯이 단군왕검이라 한다. 그런데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 단군을 사람의 이름이라고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단군왕검을 단군임금이라 쓰기도 한다. 물론 최근에서야 몇몇의 사학자나 특히 재야학자로부터 단군은 밝은 임금이란 뜻의 우리말임을 밝힌 책들이 나오고 있지만, 아직도 학교에서는 고유명사로 가르치니 참 답답한 일이다.
아니, 기원전 2333년에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고조선이란 나라를 세웠다고 똑 부러지게 가르치고만 있어도 이렇게 원통하지만은 아니 할 것이다. 우리의 역사교과서에는 고조선이 언급되면서도, 단군신화라는 이야기가 같이 실려있어 고조선은 만들어진 역사로 인식될 수밖에 없게 되어있다. 정사의 고대사를 연구한다는 역사학자의 글과 저서에는 분명히 단군신화의 내용분석과 그 의의를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 대부분이 알고 있다는 단군신화를 다시 살펴보자. 여기에는 「… 환웅이 신령스러운 쑥 한줌과 마늘 20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했다. 곧 곰과 범이 이것을 받아서 삼칠일(21일)동안 금하니 곰은 여자의 몸으로 변했으나 범은 금을 잘못해서 사람의 몸으로 변하지 못했다 …」이란 내용이 실려 있다.
이렇게 삼국유사에 실린 글을 인용하면서, 곰을 숭상한 족속인 곰족과 호랑이를 숭상한 족속인 호랑이족 그리고 태양을 숭상한 족속인 태양족 사이에 일어났던 다툼과 동화의 역사적 사실을 극화한 것이란 친절한 해석도 싣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화라 받아들일 지라도, 이 글을 더 분석해 볼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쑥과 마늘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쑥과 마늘만 먹고, 굴속에서 햇볕을 보지 못하게 하였는가? 왜 백일동안 햇볕을 보지 말라하였는데, 삼분의 일도 아니 되는 삼칠일만에 곰이 사람이 되었을까? 곰만 사람이 되고, 호랑이가 사람이 되지 못한 것은 겨울잠을 자는 곰과 그렇지 않은 호랑이의 습성을 나타내기 위해서란 말인가? 기원전 이천 년경도 신석기시대의 후반기로 깨여 있던 시기로 호랑이가 담배를 피웠단 말로 덮고 넘어갈 그렇게 어리숙한 시기만은 아니었다.
우리가 이것을 똑바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위서」라고 학자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환단고기』내의 『단군세기』를 살펴보자. 단군왕검조의 앞쪽에 「… 신인(神人)의 덕이 있어 멀고 가까운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복종하였다. 나이 14살인 갑진년에 웅씨왕이 그 신성함을 듣고 뽑아 올려 비왕을 삼고 …」라고 쓰여 있다.
그리고 『단기고사』의 제 1세 단군왕검기를 보면 「… 신성하시고 분명하시며 인애하시고 자비하셨다. 또한 도는 천지에 통하시고 덕이 사해에 미쳤으며 … 그 덕은 천지를 견줄 수 있고 그 밝음은 해와 달과 같았다」고 쓰여 있다.
한편으로 『환단고기』의 삼성기전(三聖紀全)의 상편을 보면 「…스무 하루 동안을 택하여 천신에게 제사지내면서 외물을 꺼리고 조심하며 문을 닫고 스스로 마음을 닦으면서 공을 드려 효험이 있기를 빌었다. 약을 먹고 신선이 되어 괘를 지어 미래의 일을 알고 상을 잡고 신을 움직이며 신령스러운 무리와 모든 밝은 자들에게 명하여 돕도록 하였다 …」
여기서 우리는 이런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단군왕검은 신통하고 신명 하듯이 모든 일을 널리 알고 앞일도 척척 알아 맞추었기에 그를 그들의 지도자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앞일도 알 수 있었다면 그는 한사람의 무당으로 살면서 나라의 앞날을 점치고 제사를 지내던 제사장의 성격이 더 큰 제정시대의 우두머리에 지나지 않다고 밖에 볼 수 없다고 하는 말을 듣지 않을 수가 없겠다.
말을 바꾸어 『명상체험여행』,『힐링 소사이어티』,『구름에 달 가듯이』를 읽어보았느냐고 묻고 싶다. 여기선 21일만이나 사십여일만에 깨달음을 얻을 때의 신비한 체험을 소개하고 있다. 이 체험에 이르는 공통적인 방법은 대체적으로 금식을 하며 우주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갈구할 때, 거의 죽음에 다다른 때쯤 깨달음의 신비한 체험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의 주인공들이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을 것이라는 것에는 쉽게 동의할 수가 없겠으나, 단군왕검이 어떠한 체험을 가져 지도자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라는 점은 알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나로 하여금 단군왕검의 이야기가 절대로 신화로 받아들일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고, 역사적 사실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하였던 것이다.
곰과 호랑이는 쑥 한줌과 마늘 20개를 먹으면서 백일동안 햇빛을 보지 않기로 작정을 하였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고 있을까? 이것은 굴속에서 금식을 하면서 삶의 이치를 깨우치기 위해서 아사달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행해졌던 고행을 나타낸 것이라 생각된다. 지금도 흔히 하는 것처럼 금식을 하면서 깨우침을 얻고자 하는 것과 꼭 같이 말이다.
만약에 아사달 사람들이 의식주에서는 벗어나 풍요로운 생활을 하였다면 그들의 최대 관심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누구일까? 이 우주의 원리는 도대체 무엇일까? 이 우주와 나는 무슨 관계에 있을까?」라는 의문을 지금의 사춘기에 있는 청소년들이 가지듯이 그들도 가졌었겠다. 지금의 청소년들보다도 더 순수한 마음으로 말이다. 이런 의문을 가진 사람들한테 먼저 깨달았던 사람들의 가르침(『천부경』)이 있었다면 금식 21일만에 우주와 자기가 하나가 되는 체험을 가질 수도 있었겠다. 하늘과 땅과 내가 하나인 이치를 깨달아 올바른 삶의 자세를 갖추고 앞날까지도 바라볼 수 있는 신통함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명상을 하는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의 경험에 비춰 본다면 쉽게 이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명상훈련을 하는 것을 보면 어린 나이인 초·중학생들이 쉽게 초능력을 발휘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니 왕검은 14세 이전에 깨우쳐 14살에는 비왕으로 받들어졌고 37살에는 아사달의 지도자로 모셔졌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는 깨우침을 얻어 무엇이든 훤히 알고, 또 맑은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이런 그를 그때의 사람들은 어떻게 불렀을까 의심스럽지 않은가. 즉 단군왕검과는 어떠한 관계가 있을까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하겠다.
앞의 역사편의 들어가는 말에서, 나는 우리의 역사기록을 이두로 읽어야 한다고 강조를 하였다. 그러면 이두로 읽는 단군왕검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의심스럽지 않은가? 같이 한번 살펴보자.
북애(北崖)가 1675년에 지은 『규원사화(揆園史話)』에 「단군이란 박달(朴達)임금을 번역한 것이기 때문에 단군이라 한다」라는 구절과 「우리말에 단이란 박달(朴達) 혹은 백달(白達)이라고도 한다」는 구절이 있듯이 ‘박달’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두한자로 박달나무 단(檀)을 썼을 것이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의 글에서 밝혀졌으니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자, 이것은 잘 이해가 된다고 하자.
그런데 군(君)은 무엇을 의미할까. 단지 임금 군자이니 밝은 임금이라 하면 된다. 한술 더 떠서 중국인들이 우리의 임금을 낮추어 부르기 위해 작은 지방을 다스린다는 뜻으로 군을 썼기 때문에 우리는 제(帝)를 써서 「단제」로 불러야 한다고 누구는 주장하고 있다.
이 같은 주장은 우리가 한자에 중독되어 있어서 나온 말이다. 실제로 우리말의 뿌리를 찾아가면 군은 순수한 우리말이다. 서정범 선생이 쓴 『우리말의 뿌리』란 책을 보면 사람을 뜻하는 「굳」에 뿌리를 둔 말로 지금도 일꾼, 장꾼, 나무꾼에서 군이 쓰여지고 있다. 그러면 「단군」은 「박달군」이 되어야 하고, 지금 우리가 쓰는 말로 한다면 「밝은 분」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왜 그를 밝은 분이라 하였을까. 아마도 이에 대한 대답은 아사달시대에 살았던 그들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겠기에 이 물음을 던져 보지 않을 수 없다. 아침의 나라를 다스리는 분이라 밝은 분이라 했다. 글쎄, 이것은 수긍이 잘 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다른 이유를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 다른 이유로 그를 밝은 분이라는 부른 것은 굴속에서 금식의 고행을 하여 깨달음을 얻어 모든 것을 훤히 아는 밝은 사람이었기에 그렇게 불렀고, 또 그를 지도자로 삼았던 것임을 나타내는 것일 것이다.
즉 우리가 신화로 배웠던 「굴속에서 쑥과 마늘만을 먹으며 사람되기를 빌며 근신하여 삼칠일만에 곰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금식의 고통으로 깨우침을 얻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아울러 깨우침의 결과로 곰 같은 우둔한 인간이 모든 것을 훤히 아는 새사람으로 태어났음을 뜻하는 것이겠다.
이 명백한 사실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단군은 사람의 이름이 아니고, 직위를 뜻하는 것이겠다. 따라서 「단군상」이라 하여 학교마당에 세워놓는 것은 잘못이라 하겠다. 47분의 단군(밝은 분)이 있었으니, 한 사람의 동상이라면 시조인「왕검상」이 아니면 「왕검단군상」이라 부르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2. 단군(밝은 분)과 기자(개아지)들
   밝달군 왕검은 칼을 앞세워 힘으로 왕이 된 것이 아니다. 우주의 이치를 훤히 알기 때문에 지도자로 받들어진 것이다. 이와 같은 전통은 오래까지 이어져 왔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신라의 처음 왕인 박혁거세(밝게 빛나는 거세)가 6촌의 촌장들에 의해 추대되었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우주의 이치를 깨달은 밝달군 왕검은 어떤 사람이었으며 어떤 다스림을 펼쳤을까. 금식으로 깨달았으니 적게 먹고 그것도 채식을 주로 하였을 테니 100살 넘게 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아 오랫동안 지도자로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빈손으로 감을 알았을 테니 여러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큰 궁궐 짓기는 아예 생각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 앞날에 일어날 일을 알았으니 큰 빗물에 사람들이 다치지 않게 미리 대비케도 하였겠다. 그러하니 아사달 사람들은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고, 또 다른 사람들을 다치게도 하지 않으며 그지없이 평화롭게 살았을 것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지 않은가?
이것을 말하면 많은 사람들은 꿈 같은 이야기라 한다. 그런데 옛 중국의 사서에도 아사달 사회에선 도덕이 서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자연과 더불어 살며 우주의 이치를 깨우치려고 선학에 정진해 왔던 조상의 슬기가 면면히 내려져 왔음을 지금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그리고 평화를 사랑했던 그 피가 지금 우리에게도 끊임없이 흐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지 않나 한다.
이런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면 이런 쪽에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들한테는 궤변으로밖에 받아들일 수 없을 테니 아사달의 밝달군 이야기나 더 해보자. 처음 밝달군 왕검은 아사달을 93년 간 다스리며 130세 까지 살았다. 인간의 수명은 약 150세까지로 밝혀졌으니 이 정도는 충분히 살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암의 『단군세기』에는 왕검이 돌아간 후 태자 부루가 왕위에 오르고 58년 간 재위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대야발이 쓴 『단기고사』에는 왕검이 왕에 오를 때 맏아들 부루를 태자로 삼았고, 똑같이 58년 간 재위하였다 한다. 그렇다면 부루는 10세에 태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160세까지 살았어야 한다. 물론 단군세기에선 왕검재위 67년에 태자 부루의 기록이 처음 나오니 이때에 부루의 나이가 30세였다고 가정하면 56세에 왕위에 올라 114세 경에 돌아 갔을 것이다.
사람을 널리 이롭게 함(홍익인간)을 통치 이념으로 하는 왕검께서 꼭 자기자식을 왕위에 앉히고자 하였을까. 나는 태자라는 기록은 후세 사람들이 자기가 살았던 정치체제의 눈으로 바라본 잘못으로부터 붙여진 것이라 생각한다. 깨우친 사람이 무슨 욕심과 미련이 있어 자기자식에 집착하였을까.
나이가 들면 자기 자식들보다는 나라안에서 깊이 깨우친 사람을 찾아 다음의 대를 준비하도록 하는 것이 더 우선이었을 것이다. 4세 단군 오사구가 돌아갔을 때 양가(羊加)의 구을이 왕위에 오르듯이 갑자기 돌아가 준비가 안되었을 때는 밝달군이 돌아간 후에 나라안에서 사람을 찾아 추대하였겠다. 그런데도 될 수 있으면 왕의 자손으로 대를 이어 왕위를 이어온 것처럼 쓰인 것은 후대에 옮겨 쓴 사람들의 바람이었을 뿐이지 사실과는 다를 수가 있겠다.
한편으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대야발이 쓴 『단기고사』에서 아사달을 전후로 나누고 기자조선의 기록에 「제 1세 서여(西余)부터 42세 마한(馬韓)」에 이르는 역사기록들이 쓰여져 있다. 그리고 제 1세 서여의 기록에 보면 기자(奇子)의 성은 환(桓)이라 되어있고 기자의 뜻은 태양의 아들이며 황손이란 글이 있다. 기자는 중국의 기록에 나와 유교에 편향되었던 조선의 지식인들에 의해 높이 평가되었으나, 현대사학에서는 「주나라의 신하될 마음이 없어 동쪽으로 왔다」하여 중국인의 일족일 수도 있다고 보아 선지 우리의 역사체계에서 빼려고 한다. 헌데 기자도 이두 문자일 수 있을 테니 이를 우리말로 읽으면 개아지가 아닌가 한다. 이렇게 읽는 것은 내가 읽은 것이 아니고 천관우씨의 글에서 찾아 낸 것이다. 그리고 『우리말의 뿌리』란 책에서 개는 해를 뜻하는 「갇」에서 나온 말로 지금도 「날이 개다」란 글에서 쓰이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기자 즉 개아지는 「해 아들」을 뜻하고 있으니 단기고사의 기록도 올바른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하겠다.
그러니까 햇볕이 드는 남쪽 나라라는 가야도 이 해를 뜻하는 개에서 나왔을 테고, 일본에서 신(神)을 뜻하는 가미(かみ)의 가도 개에서 나온 말로 가미는 햇님을 이른 말이겠다.
밝달군이 송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널리 그 영향을 미치며 동북아시아 지방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19대 밝달군 종년의 아우인 청아왕 종선(菁莪王 縱鮮)의 증손인 서여는 자기가 해 아들이라 하여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였겠다.
기후나 지형상으로 볼 때 아사달은 수렵과 농업을 함께 하여 도덕정치로도 충분히 다스려지는 사회였을 것이다. 그러나 황허강 유역에서는 벼농사가 중심이 되어 식량생산량을 크게 늘일 수 있게 됨에 따라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을 테니 거기에 맞는 새로운 정치체제가 생겼을 것이다. 즉 사유 재산이 인정되어 빈부의 격차가 벌어지므로 힘이 지배하는 정치체제가 발전하였겠다.
이런 정치체제는 송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아비여(부여:夫餘, 아비 나라)에서 멀리 떨어진 남쪽 지방(번조선:番朝鮮, 지금의 요녕성 지방)의 아사달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끼쳤겠다. 그리하여 이 지방에서 서여는 힘에 의해 지배하는 정치체제를 갖춘 개아지 아사달을 세웠을 것이다. 해를 받드는 겨레 속에서 내가 해 아들이라 했으니 전제군주의 특성을 띄었다고 밖에는 볼 수 없겠다.
그렇다면 길림(吉林)에서 영고탑(寧古塔)으로 옮긴 뒤 아사달은 아직도 공동생활의 도덕정치의 수준에 머물러 있으니 나라라 볼 수 없고, 사유재산제가 발달하여 통치체제를 갖춘 개아지 아사달은 나라라 하여야겠는가가 의심스럽다 할 것이다. 지금도 신라, 고구려, 백제의 나라 시작 년도를 가지고 싸우고 있듯이 말이다.
나는 이런 쪽의 공부를 하지 않아 어떻게 결론을 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중앙집권의 전제정치만이 발전된 정치체제라고 본다는 것은 참 위험한 발상이라고 본다. 옛날보다 훨씬 많이 깨우쳤다는 현대인들도 지금 중앙집권체제에서 지방 분권체제로 가고 있고, 빈부의 격차를 줄이는 사회보장체제 쪽으로 가고 있으니 말이다.
한편으로 밝달군의 나타남은 47세 고열가(古列加)까지로 끝나는 것일까? 그럼 한반도에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밝달군의 유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뜬구름 잡는 소리인지는 몰라도 아사달 시대 이후에도 깊이 깨우친 사람들을 밝달군이라 불렀다고 나는 생각한다. 신라의 처음 이사금을 박혁거세(밝게 빛나는 거세) 라 부른 것처럼 말이다.
요사이 초·중학교에 세워진 왕검상들의 머리를 잘라내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여호와」이외의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가르침을 받드는 자들의 짓거리로 볼 수밖에 없겠지만. 그리고, 어느 절에 들렀더니 삼성각(三聖閣)의 탱화에 부처를 가운데 모시고 양쪽에 흰 수염을 늘어뜨린 할아버지 두 분을 모셔서 그린 것을 보았다. 참 우습지 않은가? 대웅전에는 부처를 모실지라도 우리겨레의 큰 인물인 환인(桓因 : 환님?), 환웅(桓雄 : 환곰 〉환금?), 그리고 환검(桓儉 : 왕검)에 제사를 드리기 위해 절 위쪽에 모셔 왔던 것이 이렇게 변질되어 있으니 말이다.

3. 일본인들이 하는 역사왜곡의 근원
최근에 일본의 중학교 역사교과서의 개편 때 한일관계에 관한 역사기술이 왜곡되어 많은 논란이 있었다. 이 역사왜곡사건은 작년에 처음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년 전에도 꼭 같은 일본역사교과서의 왜곡에 대한 격렬한 항의가 있었다. 이 왜곡된 일본역사교과서에 대한 분노와 바로잡기 운동의 끝마무리로 시민헌금으로 세워진 「독립기념관」이 탄생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럼 일본인들이 역사왜곡을 하는 근본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일본인들은 20세기 초에 36년 간 식민지배를 하며 저지른 일들을 미화하려하고, 또 식민기간에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초등교육실시, 철도부설 등 많은 이로운 일을 해주었다는 망발을 서슴지 않고 있다.
이렇게 역사를 왜곡하려는 것은 그들의 다음 세대에게 선대의 잘못을 지워버려, 죄책감으로 움추려드는 새싹들에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함이며, 또 군국화하려는 획책이 꿈틀거리기 때문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나는 앞에서 말한 것이라기보다는, 아니 이것뿐이기보다는 더 큰 이유가 있어 이웃나라인 우리의 역사를 깔아뭉개려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일본인들이 우리의 역사를 깔보는 근본원인은 「임나일본부」에 있다고 생각한다. 요번에 「임나일본부」가 단지 몇 개의 교과서에서만이 언급되었고, 이제 일본의 역사학자들 대부분이 일본서기에 기록된 임나일본부를 부정하는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할 지도 모른다.
정말로 그럴까? 임나일본부는 일본인들 사이에 지금도 뿌리깊이 자리잡혀, 우리나라의 남부를 이백 년 간 지배를 하였다고(369∼562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최근에 삼십여 년 간 지배를 한 것이 무슨 큰 죄가 되느냐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말을 하면 많은 독자들이
'아니,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할것이다.
지금은 대부분의 일본역사학자들조차 임나일본부의 허구에 대해 뜻을 모으고 있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다시 임나일본부를 언급할 필요가 없다는 우리 역사학자들이 많은 것처럼 말이다. 정말 그럴까.
그러나 지금도 「임나일본부」는 생생이 살아 있어 일본인들은 이것에 대하여 분명하게 배우고, 이 배움에 따른 「조선」의 업신여김은 계속되고 있다. 교과서에 실리지 않는다 해도 입시를 위해 빼지 않고 읽고 있는 지금의 역사참고서에는 임나일본부에 대한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런 허구의 역사가 일본인들에게만 주입되는 것도 원통할 일인데, 더 큰 문제는 세계인이 이 허구의 역사기록을 그대로 배우고 또 읽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인이 쓴 동양사는 물론 일본자료를 활용하여 쓴 서양인들이 쓴 동양사에도 버젓이 「미마나(임나일본부)」에 의해 우리나라 남부를 200년 간 지배하였다고 쓰여 있다.
유명한 영문판 브리테니카 사전의 일본역사 편을 보라. 분명히 미마나라는 지배체제를 두어 남한을 지배하였다고 쓰여 있다. 물론 우리말로 된 브리테니카 사전에만은 이 내용을 빼놓았다. 눈 가리고 아옹하는 꼴이지 않는가.
임나일본부에 의한 남한경영이 잘못이라면 동양사에 관한 책이나, 모든 사전에서 잘못 실려 있는 내용을 올바른 내용으로 바꿔야 하지 않는가. 왜 우리 역사학자들과 정부는 이것을 못하고 있을까.
일본의 역사기록 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와 중국의 옛 역사기록에도 「임나」가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임나가 어떤 나라인가를 정확히 규명하지 않고서는 잘못된 임나에 대한 기록을 바꾸라고 우리가 주장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임나」가 어떤 나라인가를 정확히 알고 있느냐고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자신 있게 정확히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름 아니라 「임나」는 「맏이 나라」요, 「대가야」이다.
어째서 그렇게 보느냐고 한다면 하나하나 설명을 하여야하겠다.

4. 임나일본부
연구실에서 가졌던 환영식에서 일본의 대학원 학생이 역사부도를 갖고 와서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가 있었다는 지역을 가리키며 옛날에 일본이 우리나라의 남쪽을 지배하였다는 것을 나에게 환기시켜 주려고 하였다.
일본이 임나일본부를 두어 우리나라의 일부를 지배하였다는 억지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들은 것도 같고, 또 전혀 들어보지 못한 것도 같고 그저 긴가민가하여 일본고대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일본에서 나온 이 책 저 책을 모아보니 임나일본부를 기술하지 않는 역사책이 오히려 희귀하였다. 그러니까 일본의 국사 교과서, 참고서, 일반인 및 전문가용인 단행본 및 역사전집에서는 물론, 외국인이 쓴 동양사에도 언급이 되어 있고, 이도 부족하여 『임나일본부와 왜』,『임나흥망사』등의 단행본까지 나와 있을 정도이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일인들은 임나일본부의 존재를 당연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에 새삼스럽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 그들이 임나일본부에서 말하고 있는 주내용은 어떤것인가. 그것은 가야지역에 369년부터 임나를 두어 562년까지 남부지방을 지배, 운영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을 역사적으로 증명하는 자료로 「칠지도」,「광개토왕비문」,「일본서기」등을 들고 있다.
물론 이 가설에 대한 반박으로 쓴 역사학자 김석형씨의 『고대조일관계사』와 이진희씨의 『호태왕비의 수수께끼』에서 역사를 왜곡하기 위한 그들의 헛된 노력을 파악할 수 있었으며, 역사가는 아니지만 한일관계사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쓴 장용학씨의 『허구의 나라 일본』을 읽으면서 상당부분의 의문을 풀 수 있었다. 그렇지만 20여 년 간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인 고대사가 언제나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일본이라는 명칭은 670년 근방부터 쓰기 시작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중 문무왕10년(670년) 12월에 왜인들이 해뜨는 곳에 가까이 있기에 왜국을 일본으로 바꾸었음을 알리는 내용이 있으니 그 시기부터 쓴 것은 확실하고, 임나일본부는 일인들 주장대로 562년에 멸망되었으니 임나일본부란 말은 후대에 만들어 쓴 것이 된다. 그러하니 전혀 믿을 구석이 없어 그냥 무시하고 일인들을 보고 까불지 말라고 해버리면 그만일까.
그러나 그냥 넘어가기는 마치 책임감의 회피이거나, 반박에 자신이 없으니 꼬리를 내리는 꼴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따지고 넘어가야 만이 일인들의 잘못된 역사관을 없앨 수 있고, 또 지금도 일제 36년 간의 지배를 당연시하는 망발들을 그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임나는 우리나라, 중국 및 일본 역사서에도 나오고 있으니 이를 부인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예로써 414년에 세워진 고구려 호태왕비문에서 임나가라(任那加羅)를 볼 수 있고, 삼국사기의 강수전(强首傳)에 자기는 임나가랑(任那加良)사람이라 하였으며, 또 삼국사기의 덧붙인 글에 이곳을 대가야(大加耶)라 하였다. 또 924년에 세운 신라 진경대사탑비에 대사는 김씨로 그 조상은 임나의 왕자라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남쪽으로 쫓겨 남중국에서 연명하고 있던 송나라에서 왜국의 요구에 의해 6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이 될 때 6국 중의 한 나라로서 임나가 들어 있다.
한편으로 『일본서기』에 임나일본부를 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왜 그들은 임나를 「미마나(みまな)」라 부를까 그 이유를 알면 임나를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현재 일본인들이 하고 있는 미마나의 글자풀이에 관심을 아니 가질 수가 없었다. 미마나의 글자풀이중 한 예를 들어보면 「한국어로 신(主·王)의 땅(성지)이란 의미인 임나(ニンナ)를 일본인이 낸 발음이 미마나」라고 하는 뜻풀이도 있다.
가야인들이 왜인들이 지배하는 곳을 任자를 써서 성지로 불렀다. 지배받는 사람들이 욕을 하면 했지 그렇게 높여서 부를 수 있을까. 그들의 글자풀이는 해도 너무하다.
그러면 임나는 무엇을 의미하며 도대체 어떤 나라였을까?. 우리가 이 임나라는 나라에 대해서 정확히 알지 못한다면 임나일본부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의 해결에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다.
설령 나도 지금까지 우리 역사학자들이 하였던 것처럼 임나라는 나라는 없는데 일본인들이 지어낸 허구의 나라라거나, 또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어디에선가 정치체제를 갖고 있을 때엔 철기문화 등의 고고학적 자료들을 예로 들어 임나의 문물과 정치력이 왜국보다는 훨씬 앞섰기 때문에 왜국이 임나일본부라는 식민체제를 두어 남한을 경영할 수는 절대로 없었다고 강변하면 끝날 일인가.
이를 읽는 우리나라 사람이면 그렇다 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우리가 일본에 여러 가지 문물을 전달해 주었다고 지금까지 배운 역사지식을 바탕으로 한다면 그야 그럴 수밖에 없지 라고 할 수 있겠다. 한글판 브리테니카 사전이 이 투이다. 영어판은 자신이 없어서 못 바꾸었는지 몰라도….
그런데 일본인들도 그리고 세계인들도 고개를 끄덕여 줄까 의문이다. 그들은 200여 년 간 왜인들이 남한을 경영하였다고 배웠는데 문화전수의 몇 가지 사례에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가 지금까지 잘못 배워 왔다고 할까.
언제인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날 갑자기 이 문제가 풀렸다.
우리나라에선 옛날에 한자로 기록할 때 이두로 기록하는 경우도 있었다는 사실이 떠오르고 부터 문제가 풀린 것이다. 향가를 보더라도 지명,관직,이름 등에 이두가 쓰였음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 任자를 이두로 풀러 보자. 「맡길 임」. 이때 「맏나」가 떠오를 것이다.
「맏」의 소리를 나타내기 위해 「任」자를 빌린 것이고 「나」는 나의 소리가 나는 「那」로 쓴 것이다. 「맏나」지금 말로 풀면 「맏이 나라」이다. 그러니까 이 말은 큰 나라로서는 6가야, 그리고 그 주위에 작은 많은 나라들로 이루어진 가야국들 중에서 맏이가 될 수 있는 나라란 말이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도 임나를 맏이 나라란 의미로 대가야라 하지 않았나.
이런 뜻풀이를 부정하기 위해 「任」은 「맡」길 임이니 어찌 「맏」이 될 수 있느냐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리가 같은 받침을 다른 홑소리로 쓰는 것은 훈민정음이 만들어져, 소리는 같으나 모양이 다른 것을 써서 쉽게 구분하였던 것을 이해한다면 세종조 이전에는 「맡」이나 「맏」의 구별이 없었음이 쉽게 받아들여 질 것이다.
「맏나」는 우리말 풀이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일본인들이야 지금도 받침 말을 거의 쓰지 않으니 「맏나」를 「마나(まな)」로 부를 수 밖에 없었을 테고, 이 맏나에서 문물을 왜국에 전달해 주었으니 존칭어에 붙는 「미(み)」자를 앞에 덧붙여 「미마나」라고 밖에 더 쓸 수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말로 맏이나라님인 것이다.
어느 정도 의문이 풀리는데 그래도 미진하다할 것이다.
강수전에 보면 낙동강을 한참 거슬러 올라간 오지인 고령이 대가야인데 이 오지에 가야연맹의 맹주가 있었다는 것은 앞뒤가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김수로왕이 허황후를 맞이하는 장소로나 중국과 왜국과의 무역 중심지이며 철광석을 쉽게 구하여 제철기술이 발달한 김해지역의 가야국이 가야연맹의 맏이 나라가 되어야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기록이나 발굴되는 역사유물을 잘 설명할 수 있는데 말이다.
그럼 김해가야를 「맏나」로 하자. 우리나라 말의 성격상 맏나는 어디에 있는 나라를 찍어서 붙인 이름이 아니고 여러 나라 중에서 중심이 되는 나라를 가리키는 말일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최근 KBS에서 방영한 「역사스페셜」의 가야지역의 철기문화 편에 김해 및 부산지역에서는 5세기 이전까지의 철기유물(정교한 철제 갑옷, 철창, 말에 씌었던 말갑, 얼굴가리개 뿐만 아니라 화폐처럼 쓰였을 철정 등)이 발견되나, 5세기부터는 전투적인 철제 유물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한다. 그 대신에 5세기부터 제작된 철기 유물은 고령인근의 내륙지방에서 발견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 프로에서 이렇게 철기유물의 분포가 갑자기 바뀐 이유로 호태왕이 신라의 요청을 받아 400년에 5만의 군대로 김해가야를 초토화하여 이 세력이 낙동강내륙으로 이동하였기 때문이라고 호태왕비문의 기록을 근거로 설명을 하였다. 호태왕비가 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쓰인 것이니 그 내용이 고구려 중심으로 그리고 어느 부분에서는 약간은 부풀려 있을 진 몰라도 그 기록을 사실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5세기 전에는 김해지역의 가야가 「맏나」로 불렸고, 호태왕이 전투에 단련된 기마병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의 군대로 이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든 후에는 일부는 낙동강을 따라 위로 올라가 새로운 「맏나」를 세웠고 일부는 일본 땅으로 옮겼을 것이다.
그리고 「역사스페셜」에서는 가야인이 일본지역으로 옮긴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일본 오사카에 있는 「흑회산 고분」에서 발겨된 전결기법으로 만든 철갑 옷이 가야의 그것과 똑같으며 400년을 기점(일본인들의 주장)으로 철갑, 갑주 등의 전투적 철제 유물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현상을 예로 들었다.
처음의 맏나가 김해지방에 있었고, 고구려군에 패하여 뿔뿔이 헤어졌던 것은 유물만이 증명을 하는 것은 아니다. 전투에 패한 가야인 들은 일본 땅으로 옮겨 새 나라를 세웠을 테고 이 왜국은 일찍이 중국과 교역을 하던 가야인 들의 외교술과 조선기술을 바탕으로 413년부터 남중국(東晋, 宋, 齊, 梁)에 계속 사신을 보내 일본인의 자랑인 왜 5왕(讚, 珍, 濟, 興, 武)의 이름을 중국의 진서, 송서, 남제서, 양서에 남겼으며 마침내는 정동대장군의 칭호를 502년에 받을 수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여하튼 가야인이 중심이 된 왜국에 대해서는 보다 상세한 고찰이 있어야 하니 여기선 그만 그치고 「임나」뒤에 붙인 「일본부」의 성격을 규명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일본부는 앞에서 썼듯이 아주 훗날에 붙인 말이니 그 때는「왜마을」이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상상의 나래를 펴서 2세기에서 5세기까지의 그때로 한번 가보자! 그 때엔 지금처럼 교통이나 통신수단이 발달해 있지도 않았을 테고, 많지 않은 사람들이 농사와 수렵을 하며 넉넉한 땅에서 살았을 테니, 필요하다면 몇 백 명 또는 몇 천 명이 큰 저항을 받지 않고 새로운 땅을 찾아 언제든지 움직여 살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맏나」의 땅에 맏나와 왜국간 또는 왜국과 중국간에 무역을 하고 또 외교적인 문제도 다루기 위해 왜인들이 무리 지어 살았다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맏나에 왜국을 대표하는 왜인들의 마을이 있었다면 그들은 맏나와 백제 또는 신라와의 사이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알았을 것이다. 이런 사건들이 어떻게 꾸며져 기록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왜국의 역사기록에 남을 수도 있겠다. 자기나라에 직접 관계되었던 일이 아닌데도 마치 왜국의 통치자가 한 것처럼 부풀리는 것도 가능하였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어느 역사학자의 글을 보면 백제가 중국 동부에 상당한 통치지역을 두었던 것으로 기술하였다. 그것은 백제와 중국과의 교역중심지거나 중간지점에 백제인이 중심이 되어 만든 마을들의 기록을 너무 튀긴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해주지방에 중국인들이 두었다는 대방군이 마치 황해도는 물론 그 주위까지도 모두 다스렸다고 일인들이 주장하니까 거기에 솔깃한 사람들이 우리는 한사군이래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고 조상을 탓하는데 그것은 전혀 그렇지 않지 않은가한다.
왜냐하면 해주지방은 우리나라의 서해안을 따라 올라오다가 황해를 가로질러 중국으로 가기 위해 숨을 고르기에 가장 좋은 곳이니 중국인들이 여기에 마을을 이루어 배에서 필요한 식량 등을 준비하고 아울러 그 근방의 나라들과 교역을 하였을 것은 너무나 명확하다.
새로운 문물은 언제 어디서나 나누게 되었으니 주위의 마한국 들은 이들과 싸우기보다는 오히려 잘 지냈을 것은 뻔하다.
이것은 신라·고려를 거쳐 이조 때까지 부산에 왜관을 두어왔고, 일본인들도 17세기 중반 이후 일본인들이 나가사끼의 출도(出島)에 화란의 상관(商館)을 두어 그들과 필요한 문물을 교환하였던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임나'는 맏이 나라 즉 큰나라를 뜻하는 '맏나'를 이두한자로 쓴 것이며, 일본부는 왜인들이 맏나에 두었던 마을로 교역과 외교를 담당하는 사람들이 살던 곳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5. 단일민족
우리 민족은 두상의 모양과 코 높이 그리고 머리칼의 형태로 볼 때 3개의 인종 중에서 황색인종(몽골로이드)에 속한다고 한다.
그리고 특이한 몽고반점이 있는 몽고, 중국, 한국, 일본, 인디언 종족 중에서도 우랄알타이어를 쓰는 종족(바이칼호 주변과 만주, 한국, 일본 등에 분포)에 속한다.
이런 겉모양이나 쓰는 말에 의해 분류하는 것 외에도 우리 민족과 다른 민족에 대한 혈액이나 유전인자의 차이를 살펴보더라도, 우리 민족이 주위에 있는 나라들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인자들과는 다른 특징적인 인자를 갖고 있음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른 종족이 특징적으로 갖고 있는 유전인자 중에서 한두 가지를 우리 민족도 갖고 있음도 밝혀지고 있다.
이런 현상은 다른 민족들도 모두 갖고 있는 것으로, 어느 민족도 하나의 순수한 혈통으로 천년만년을 이어왔다고 하기 어려우며 우리 민족도 예외는 아닌 것이다. 그러기에 각 민족이 갖는 유전인자들에 대한 비교는 이웃 민족 간에 있어서 가깝고 먼 상관관계를 밝혀내기도 한다.
그러면 우리 민족은 어느 민족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을까?
구석기부터 신석기를 지나 아사달 국가를 성립한 후에 지금까지 다른 종족의 사람은 만주 지방과 이 한반도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는 생각을 버리고, 비운 마음으로 바라보자.
유전인자의 분석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우리 국민들이 갖고 있는 얼굴모양만을 살펴보더라도 북방족과 남방족이 섞여 만들어진 민족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고 한다. 이 내용은 한 월간지에 실린 조용진 교수의 글 속에서 읽을 수 있는 것으로, 그는 그 글에서 아무개는 북방계에, 어느 누구는 남방계에 가까운 얼굴이라 했다.
나는 20년 전 일본에 살면서,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을 보며 저 사람은 우리에게 익숙한 필리핀 사람과 비슷한 남방계와 같구나. 그리고 저 사람은 우리와 크게 틀리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걷곤 하였다. 그만큼 일본은 우리나라에서보다도 북방과 남방계 종족이 섞여 있음을 더 잘 구분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일본에선 피가 완전히 섞이지 않은 남방계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얼마전의 신문기사를 보니 인류유전학을 연구하는 일본인 학자는 「한국인과 일본인은 유전학적으로 구분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비슷하다」하며, 일본인 80%가 북방의 도래인이었으며 중국보다 한반도를 통해 온 사람들이 더 많았다고 하였다.
여하튼 지금의 일본에서도 북방족과 남방족의 구분이 비전문가인 나의 눈으로도 확연히 구분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에 둘도 없는 단일민족이란다.
여기에 뒤지지 않으려는 듯이 우리는 이 민족도 「단일민족」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앞에서 살피었듯이 전문가의 눈을 빌리면 우리 민족도 북방계의 혈통과 남방계의 피가 섞인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러면 어디에 살고 있던 종족까지 이 한반도에 흘러들어 왔을까.
옛날엔 지구가 둥글지 않고 평평하다고 생각했다한다. 그래서 어디까지 가면 낭떠러지로 떨어진다고 했단다. 그리고 옛날 사람들은 자연의 힘에 눌려 자연을 몹시도 숭배하였다. 그 중에서도 낮과 밤을 구별짓게 하는 태양의 대한 숭배정신은 여러 민족에 널리 퍼져있었고, 태양을 받드는 여러 행사를 거행하였으며 태양을 최고신으로 받들었던 것이다. 우리 민족이 최고신으로 찾고 있는 하느님도 해와 관련된 것이며, 일본의 최고신 가미(かみ)도 「햇님」이다.
그렇다면 태양을 숭상하는 민족은 태양에 더 가까이 가기 위해 높게 제단을 쌓기도 하였지만, 해가 뜨는 동쪽으로 이동하여 뜨는 해를 잡으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옛날 이집트왕국의 사람도, 메소포타미아의 슈메르인들도 동쪽으로 향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흑해나 카스피해를 건너, 말을 타고 초원을 달려 손쉽게 바이칼 호수의 북쪽에까지 이르렀을 것이다.
한편으로 남방계의 사람들은 해뜨는 곳을 향해 많은 섬들을 거치며 동쪽으로 배를 저어 왔을 것이다. 이들이 맞닥뜨린 곳은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일본열도였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그 옛날에 온대지방에 속했던 만주지방의 겨울엔, 질병의 원인인 대부분의 전염병균이 죽어 사람들이 많이 살아남을 수 있는 살기에 좋은 곳이었겠다.
평양근방의 상원 검은모루 유적의 동굴에 남아있는 29종의 동물 뼈 중에서 남아있는 큰 쌍코뿔소의 뼈를 보아 옛날엔 한반도가 아열대기후였음을 알 수 있다한다. 즉 이곳은 추운겨울이 없어 많은 전염병균이 살아있어 돌림병으로 죽는 사람이 많아 살기에 좋은 곳이 아니었다.
월간지인 월간조선(2002.1)에 편집장 조갑제씨는 「로마문화 왕국-신라」란 제목의 글에서 4∼6세기 북방초원의 길을 통해 들어온 로마의 선진문화가 통일의 원동력이 되었다한다. 이렇게 보게 된 동기는 일본제1의 유리공예가인 요시미즈 츠네요(由水常雄)이 쓴 『로마문화왕국-신라』란 책을 근거로 썼다. 요시미즈씨는 옥구슬의 디자인, 제작방법, 상감된 인물 등으로 추정할 때 틀림없이 로마세계에서 만들어진 구슬이다」고 단정하고, 어떻게 아시아대륙의 끝머리에 붙은 신라에 왔을까를 궁리하다 얻은 결론이란 것도 인용하고 있다.
그리고 조갑제씨는 글에서 장한식씨가 「서기 342년 고구려를 침공한 흉노족 계통의 선비족 모용황이 지휘한 5만 5천 기병의 일부가 신라로 쳐들어와서 정복왕조를 만들었다」는 설(월간조선 1999년 9월호 게재)도 다시 기억하도록 했다.
그러나 일본인과 장한식씨의 주장처럼 한반도의 신라에만 특별히 흉노와 로마제국의 문화와 문물이 영향을 미쳤을까.
조갑제씨의 글에서도 나타나듯이 시베리아의 초원지대는 활짝 열린 곳으로 말로 달리면 몇 개월이면 서아시아에서 동아시아인 만주까지 쉽게 도달할 수 있는 좋은 통로였던 것이다.
북쪽엔 이런 좋은 통로가 열려져 있고, 또 남쪽에는 필리핀에서부터 작은 섬들이 태평양의 북쪽 끝을 따라 열도로 이어져 있으며 해류의 흐름에 맡기어 두어도 이 섬들을 거쳐 우리의 남해안에 다다를 수가 있었는데도, 구석기부터 있었던 어느 한 순수한 민족만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면 어리석은 생각일 수밖에 없다.
그 옛날에는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이 비비고 살고있지 않아, 기원전 몇 만 년 전부터 여기서 붙박고 살았던 원주민과 해가 떠오르는 곳을 찾아 나섰던 이민족들은 맞닥뜨려 싸우기도 하였을 테고 또 그렇지 않으면 빈땅을 나누어 가지며, 서로로부터 새로운 문물들을 접하면서 새로운 사고방식을 터득하고 개량된 문화이기들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늘어나고 점점 깨우쳐 갔을 것이다. 사람이 많으면 언제나 다툼이 일어나니 이 다툼들을 줄이기 위한 삶의 지혜와 통치체제가 일찍부터 솟아 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깨우침을 얻어 모든 일을 훤히 알고있는 밝은 분인 박달군(단군)을 앞세워 「아사달」이란 국가를 이끌어 갔던 것이다.
그런데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은 왜 「아침의 땅(아사달)」이라 했고, 그 주위에 같이 살았던 중국인들은 「아침에 빛나는 나라」라는 「朝鮮」이란 한자말을 써서 불렀을까. 해돋이의 장관 때문에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동쪽에 있는 나라를 그렇게 불렀을까. 해돋이를 매일 보다시피 한다면 큰 감동을 느끼지도 않았을 테니 그 자리에 살던 사람들은 굳이 아침의 땅이라 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말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한다면 「아사달」은 태양을 숭상하는 종족들이 부른 땅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이 종족들이 해가 뜨는 곳을 따라가면 편편한 지구의 어느 끝에서 해를 가장 가까이 만날 수 있다고 믿으며 동쪽으로 동쪽으로 이동하여 동해의 해뜨는 장엄한 모습을 보고 더 갈 수 없어 되돌아 선 그들이 부른 땅이 「아사달」일 수밖에 없지 않는가.
그러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옛날부터 여기에 살았던 사람은 물론, 태양에 가까이 갈려 했던 사람들이 만들어 갔던 곳이다.
열려있던 나라에선 언제나 문화가 꽃피었던 것은 역사적으로 너무나 많은 실례가 있다. 서아시아의 문화는 오직 비단길을 따라 동쪽으로 오다 중국에서 그친 것만은 아닐 것이다. 드넓게 펼쳐진 초원을 따라 동쪽으로 온 서아시아인과 그들이 가진 문화는 바이칼 호수에서 남쪽으로 꺾어 내려와 만주 지방에서 상당기간 꽃피우다가 한반도 끝까지 내려오지 않았겠는가.
얼마 전에 방영하였던 KBS의 「역사 스페셜」중 '가야인은 성형수술을 하였는가'를 살펴보자. 김해 지역의 예안리 고분에서 발견된 1600여 년 전의 두개골의 일부가 편두를 하고 있음을 밝히는 프로그램이었다. 이마의 위 부분이 뒤로 뉘어 져서 정수리가 튀어나온 기형의 모습인데 이것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고 돌로 이마를 눌러서 된 모습일 수밖에 없다며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기록도 보여주었다.
이런 편두의 모습은 일부의 여인들만이 갖고 있는데 이 모습을 가지려면 뼈가 무른 아기 때 이마를 돌등으로 눌러 이마가 뒤로 젖혀지게 하고 이에 따라 눈꼬리는 위쪽으로 향하고, 오뚝하게 솟은 코를 가진 미인을 만들었을 것이라 한다. 그리고 이 모습은 6000년 전 고대 이집트의 여인상과 같음을 보여 주었다. 그 조각품은 세계역사부도에서 본 낯익은 여인상이었다.
그리고 두개골에 난 구멍에 대한 설명으로 뇌수술을 하지 않았나 하는 가정을 보여 주었다. 왜냐하면 사고에 의해 난 구멍은 도려낸 듯이 깔끔한 구멍으로 남을 수가 없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이 사람은 수술 후 곧바로 죽었을 것이라 한다. 만약에 수술 후 살았다면 수술한 뼈에 치유환이 생겼을 텐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나에겐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최근 영국 루불 박물관의 이집트유물전시회를 하는 동경미술관에서 미라를 본 순간에 머리에 난 구멍은 뇌수술과는 거리가 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라를 두른 베를 감싸는 방법이 마치 지금 우리나라에서 시신을 염할 때 삼베로 감는 방법과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머리에 난 구멍은 수술보다는 죽은 후에 뇌 속을 비워 미라를 만들기 위해서 쓰여졌을 것이란 생각이 앞섰던 것이다.
이집트인과 같이 편두를 하였다면, 같은 방법으로 미라를 만들었을 것이라는 가정이 성립되지 않겠는가. 이집트는 아주 건조하여 아직도 미라가 남아 있지만 이 한반도는 4계에 따라 기후가 바뀌고 산성 땅이라 쉽게 썩어 미라로는 남아 있을 수는 없었는데, 패총 밑에 무덤을 만들어 뼈만이라도 남아 있는 것은 아마 후세 사람들에게 꼭 무슨 전할 말이 있는 것 같다.
여하튼 고대 이집트인들이 가야시대에 옮겨와 살았을 수도 있지만, 아마도 더 일찍부터 여러 민족들이 초원을 지나 바이칼 호수에 가까운 북쪽에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아사달에는 아홉의 구별되는 종족이 살고 있었겠다. 환단고기에 나오는 이 아홉 종족은 「황이(黃夷)」, 「백이(百夷)」, 「현이(玄夷)」,「적이(赤夷)」, 「남이(藍夷)」이고 황이는 「양이(陽夷)」, 「우이(于夷)」, 「방이(方夷)」, 「견이( 夷)」로 나뉘어 진다.
그러니까 지금의 우리는 이런 여러 종족들이 같이 살면서 굳어지진 황인종일 것이다.
그런데 단일민족이란 닫힌 눈으로 보는 세계로는 북쪽으로는 유라시아 대륙이 열려 있었고, 남으로는 해류를 따라 동으로 항해해 올 수 있었던 섬들로 이어져 있음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따라 들어왔던 왔던 여러 사람들이 갖고 왔던 문화와 그 자리에서 자라고 있던 문화가 뒤엉클어져 새롭게 피어난 문화를 가꾸며 살아갔던 문화국인 아사달이 보일 턱이 있겠는가.
흉노나 로마인들의 문화가 남긴 단편들은, 많은 사람들이 찾아 나선 해뜨는 동쪽 끝에 자리잡은 이 땅에 들어온 무수한 문화 중의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6. 새·말·볕·곰
도대체 무슨 엉뚱한 소릴 늘어놓으려고 「새, 말, 볕, 곰」을 앞에 세워 놓았는지 통 감이 잡히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도 전혀 익숙지 않아 마치 내가 장난이나 치기 위해 써놓은 것 같이 보인다.
우리 생활에서 방위를 나타내는 말이 많이 쓰인다. 그렇다면 '동·서·남·북'이란 한자말을 빌려쓰기 이전에 옛날 우리 선조들은 도대체 무슨 말을 써서 방위를 나타냈을까.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다. 한자말인 「산(山)」은 우리말로 「뫼」임은 많이 들어 바로 알 수 있는데 말이다. 그렇다고 옛 조상들도 방위를 나타내는 말이 없이는 도저히 살아 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지금 우리가 쓰는 말속에서 방위를 나타내는 옛말의 꼬투리라도 찾아볼 수 없도록 옛말이 사라져 버렸을까.
그럼 이제 우리는 방위를 가리키는 옛말을 찾아 나서지 않으면 아니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한자말인 「동(東)」은 나무에 해가 걸쳐 있는 쪽의 모양을 따서 만든 글자라 한다. 그렇다면 옛 조상들로 동쪽에서 언제나 일어났던 현상을 가리키는 말로 동쪽을 나타냈겠다. 무슨 현상이 일어났을까. 그거야 동쪽에서 언제나 해가 떠오르고 그래서 동쪽부터 밝아 오니 동쪽은 '날이 새는 쪽'이다. 그러니까 「새」나 「샌」의 말을 써서 동쪽을 가리켰을 것이란 말이다.
물론 이것은 내가 찾아낸 것이 아니다. 「샌」이 동쪽을 가리킨다고 1968년 밝힌 양주동 선생의 주장을 인용한 글을 읽고 스스로 긍정의 논리를 세우느라 생각해 본 것이다. 이 실례로는 「진한(辰韓)」, 「신라(新羅)」를 들 수가 있겠다. 그러니까 「진한」은 중국의 「진(秦)」나라 사람들이 세운 것이 아니고 「동쪽의 한(韓)」을 한자음을 빌려 이두문으로 표시한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신라」는 「동쪽 나라」를 나타내는 이두문임을 바로 알 수 있다.
동쪽이 「새」나 「샌」쪽이라 한다면 서쪽은 무슨 쪽이라 하였을까요. 『삼국사기』의 박혁거세 39년조에 마한왕(馬韓王)을 서한왕(西韓王)으로 기록하고 있고 , 『후한서』동이열전에「마한재서(馬韓在西)」로 기록되어 있으니, 진한이 동쪽 한을 나타내는 순수 우리말이듯이 마한도 서쪽 한을 나타내는 순수 우리말을 이두한자로 나타냈다고 보아야 되겠다.
그러니까「서」쪽은 우리말로 「말」쪽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말」이 어떻게 하여 서쪽을 나타내는 말이 될 수가 있었을까. 날이 새는 쪽의 반대쪽은 날리 저무는 쪽이며, 해가 지는 쪽인데 이 같은 생각 속에서는 「말」이란 글을 찾아 낼 수가 없다.
그렇다면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데 먼저 서쪽으로부터 무슨 일들이 가장 많이 벌어졌을까를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 서쪽으로부터 해뜨는 곳을 찾아 나섰던 서역의 사람들이 말을 타고 끊임없이 배달과 아사달 나라로 들어왔을 것이라고 앞에서 이야기한 바가 있다. 그러니 「서쪽」은「말이 온 쪽」이라 하여야할 것이다. 그래서 말「마(馬)」자인 한자를 빌려서 서쪽인 「말」을 나타냈을 것이란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럼 이제는 남쪽을 어떻게 나타내었나를 생각해 보자. 남쪽은 「볕이 드는 쪽」이고, 그리고 「해가 떠 있는 쪽」이다. 앞에서 「개아지(奇子)」의 「개」가 「해」를 나타내는 우리 옛말임을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볕」이나 「개」로 남쪽을 가리켰을 것이라는 가정이 가능하겠다.
나는 그 실례로서 「변한(弁韓)」과 「가야(伽倻)」를 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남쪽의 한'을 「볕한」으로 나타내어야 되는데 이와 가장 가까운 소리인 「변(弁)」을 빌려 이두말로 나타냈을 것이란 것은 이 글을 읽는 분들도 아마 확신하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가야」는 「개야」를 이두말로 나타낸 것으로 후에는 자연스럽게「가야」로 바뀌었을 것이다.
「개야」이는 「해의 나라」, 즉 남쪽나라를 가리키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야(耶)」를 중국에서는 「예」로 읽고 있다. 그렇다면 「加耶」는 「개예」를 나타낸 한자가 되고 그 뜻은 남쪽의 「예」나라임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있었던 「동예」에 비견되는 나라로서 말이다.
그런데 북쪽을 가리키는 말은 어떤 말이 있었을까. 「곰이 있는 쪽」이거나 「뫼가 높은 쪽」또 이도 아니면 「겨울에 찬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가리키는 어느 말을 쓰지 않았을까.
꼭 꼬집어 이것이라고 단언은 할 수 없지만 「곰」이거나 이 말에서 나온 「고」가 북쪽을 가리키는 말로 쓰여지지 않았나 하고 생각을 해본다. 왜냐하면 삼국시대 때 북쪽에는 「고려(高麗)」가 있었다. 동시대의 중국기록에는 분명히 고려라 하였는데 우리 역사서에는 후에 만들어진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고구려(高句麗)」라 이름을 바꾸어 불렀을 것이다.
이 옛 고려가 왜국에서는 「고마(こま)」로 불리고 있는데, 이렇게 불린 이유로는 북쪽 나라인「곰라」가 토씨가 있는 말이 거의 없는 왜국에서 「고마」로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나 생각된다.
그렇다면 새, 말, 볕, 곰이 동서남북을 가리키는 옛 말이었을 것이라 하고 나서 몇 가지 예를 들어 증명해 보자. 물론 이것은 나만이 생각하고 있는 엉터리 주장 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앞으로 계속 연구를 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방위를 나타내는 말은 꼭 필요한 말이었으니 고대사에 기록된 방위를 나타낸 이두 말을 면밀히 분석해 본다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옛말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되기에 말이다.
『후한서』의 「왜국전」을 보면 대방군을 출발하여 「사마일국(邪馬壹國)」에 이르는 길을 나타내고 있다. 이 글을 보면 대방군에서 우리나라 남동쪽 끝인 「구사한국(狗邪韓國)」을 거쳐 지금의 대마도인 「대마국(對馬國)」을 지나서 여러 나라를 거쳐서 가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왜국에 접어들기 위해 지나야 하는 「구사한국」의 「구사(狗邪)」는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 「마한」,「변한」,「진한」의 마, 변, 진이 서, 남, 동을 나타내는 말이었다면 구사도 여러 한(韓)중에서 특정지역에 있는 어느 한을 지칭한 말일 수도 있겠기에 말이다.
한자로 표시된 「구(狗)」는 개「구」자 이다. 그러니까 구사의 첫 자는 「개」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두 번째의 「사(邪)」자는 「새」를 나타내기 위해 빌린 한자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중국사람들의 발음이 「쎠」이니 이 사(邪)자로 「새」란 소리를 나타내지 않았나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사한」은 그때 말로 「개새한」이었겠다. 그러니까 「구사한국」을 지금 말로 한다면 「남동의 한나라」라야 되겠다. 이 개새한은 김해 지방에 김수로왕이 세운 「가야」가 아직 그 이름을 각 국에 각인시키기 이전에 우리나라 전역이 오직 「한(韓)」이라 불리고, 각 지역은 방위로만 구별될 때 남동쪽 끝에 있는 나라를 나타낸 나라 이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위지』에 기록된 변진전(弁辰傳)의 「변진」도 「볕샌」의 소리를 나타낸 한자이니 이것도 남동을 의미해 「개새한」과 같은 지역을 나타낸 말이라 봐야겠다.
만약에 나의 글이 억지였다면 하던 길에 한가지를 더 해보자. 아까 언급했던 왜국에 있었다는 「사마일국」에 대해서 말이다. 일본인들은 이 나라를 한자로「邪馬台國」이라 쓰고 일본말로 「야마다이구니(ゃまたいくに)라 읽고 있다. 물론 여기에 쓰인 「태」또는 「이」로 읽히는 「台」가 대(臺)의 약자로 보고 「다이(たい)」라고 읽는 것이 대부분의 일본 사학자들의 태도이다.
그렇지만 몇몇의 일본사학자의 글을 보면 일(壹)을 대(臺)로 잘못 쓰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그러니까 이(台)를 「다이」라고 읽음은 잘못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또 한가지 사(邪)를 어조사「야」로 읽는데 이보다는 「사」의 소리를 한자로 쓰기 위해 이 「사(邪)」자로 썼을 것이라는 것이다.
한자로 나타낸 이 나라의 이름을 한자소리를 빌려 읽으면 「사마일국」이란 소리에 가까웠다고 보아야 하겠다. 그리고 이두문으로 읽으면 「새말잇 나라」가 되어야겠다. 그렇다면 이 나라 이름은 「동서를 이은 나라」라는 의미의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규슈의 남쪽에 왜국의 기원설화가 있는 「고천원(高天原)」지역을 동서로 통일한 나라를 일컫는 말이 되어야 「후한서」의 기록들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될 따름이다.
아는 것도 별로 없으면서 왜 왜국까지 손을 뻗쳐 아는 체를 하느냐고 묻겠지. 이유야 많다.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일본 역사서의 고대 부분을 한번 읽어보라. 지금도 일본인들은 우리나라의 고대사를 떡 주무르듯이 제 멋대로 주무르고 있다. 실례도 얼마든지 들 수 있다. 앞에서 이야기한 「임나일본부」처럼 말이다.
이렇게 엉터리로 꾸민 역사를 지금도 일본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으니, 우리 고대사를 잘 세우려면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났던 일에만 그치지 않고 왜국에서 일어났던 일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
왜냐하면 옛날 사람들은 우리나라에서 일본 섬으로 끊임없이 옮겨가면서 역사를 꾸려갔기 때문에 말이다.


7. 왜 5 왕
「왜 5왕」이는 동진(東晋)의 역사서인 『진서(晋書)』와 동진을 이은 송(宋), 남제(南齊) 및 양(梁)의 역사기록인 『송서』『남제서』 및 『양서』에 나오는 왜왕 찬(讚), 진(珍), 제(濟), 흥(興)과 무(武)인 다섯 왕을 일컫는 것이며, 2차 대전 후 일본에서 각광을 받으며 재해석된 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한다.
일본인들이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갖는 미련을 지금 모두 버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렇게 받들어 모셨던 그 기록들이 믿을 수 없음을 종전 후 모두가 알아차린 후에 일본에도 왕권이 있었음을 밝히는 중국기록에 늦게나마 폭 빠져 버렸나 보다.
『일본서기』등인 일본 역사서의 기록을 믿을 수 없다면, 그들은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기록을 찾아 옛 왜국의 모습을 찾아보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그러니 왜의 역사에서 왜국의 기록이 처음으로 나오는 『한서(漢書)』와 왜국의 조공기록이 있는 『후한서(後漢書)』동이전(東荑傳) 그리고 「사마일국」등 많은 왜국의 내용이 실린 『위지(魏志)』왜인전(倭人傳)의 기록은 그들에겐 너무나 값진 기록이 아닐 수 없겠다.
그런데 이들의 기록에서는 번듯한 나라의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는데, 150년을 뛰어 넘어서 나타난 『송서』등에서는 왜왕이 관직을 받게 될 뿐만 아니라 세습왕권을 이룬 왜왕의 강력한 왕권이 한반도 남부에도 미쳤음이 나타난다.
즉 왜왕 무(武)때는 신라, 가야 등을 아우르는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과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의 작호까지 받았다하니 일본인들이 왜5왕을 신주단지 모시듯 함은 당연하다 하겠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이 같은 작위가 흉노와 선비에 밀려 남쪽에 피난하여 세운 힘이 약한 남중국의 나라들이 주위의 나라들을 우군으로 만들기 위해 어느 나라에게나 주었던 것임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도 일본인들은 이 왜5왕에 대한 환상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왜5왕의 중국기록과 일본인 스스로도 믿지 못하는 『일본서기』나 『고사기』에 나오는 왕의 기록과 어떻게든 엮어보려는 노력이 아직도 끊이지 않는 것 같다. 그러니까 찬, 진, 제, 흥과 무인 5왕에 이중(履中), 반정(反正), 윤공(允恭), 안강(安康)과 웅략(雄略)을 각각 대응시켜서 중국기록과 일본기록을 요리조리 맞추어 일치시켜 보려 한다는 것이다.
중국기록과 일본기록 사이의 일치성은 제일 먼저 왕의 재위 년도가 서로 잘 맞는가를 따져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중국 측의 기록으로 처음 동진 안제(安帝)때인 413년에는 왜국이 공물을 헌상하였으나 어느 왜왕인지는 밝히지 않았으니 어느 왕인지는 알 수 없다하나, 421년(安武帝)에 왜의 찬(讚)에 작호(爵號)를 주고, 438년에 찬이 죽고 동생인 진(珍)이 유사 조공하였다 기록되었다.
그리고 443년에 제(濟)가 유사 조공하여 안동장군 왜국왕에 책봉을 하였고, 451년에는 사지절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6국제군사 안동장군으로 책봉하였다.
또 때는 모르나 제가 죽고 흥(興)이 유사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420년에 흥을 안동장군 왜국왕에 책봉했고, 역시 때는 쓰여있지 않고 흥이 죽고 동생인 무(武)가 유사 조공하였다고 『송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무에 대해서는 477년에 유사 조공하였고, 502년(梁武帝)에 정동장군(征東將軍)에 책봉되었다.
이 기록만을 보면 5왕의 재위 년대를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찬(∼421∼438), 진(438∼), 제(∼443∼451∼), 흥(∼462∼),무(∼477∼502∼)가 재위하였던 때의 중간 중간의 연도를 알 수 있으니, 재위 년도가 정확히 기록된 일본의 기록과 비교해 보면 중국기록과 일본기록이 얼마나 잘 일치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찬, 진, 제, 흥과 무에 비견된다고 일본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이중, 반정, 윤공, 안강, 웅략의 재위 년도를 살펴보자.
먼저 정사라는 『일본서기』의 재위기록을 보면 이중(履中)은 400∼406년, 반정(反正)은 406∼412년, 윤공(允恭)은 412∼454년, 안강(安康)은 454∼457년이고 웅략(雄略)은 457∼480년이다.
그러하니 찬과 비견되는 왜왕은 이중이 아니라 윤공이 되어야 하는데, 윤공은 412년부터 454년까지 재위를 하였으니 찬, 진, 제인 세 왜왕의 재위 년도와 겹쳐져 아주 우스운 꼴이 되고 만다.
『일본서기』가 2백년에서 3백년 후인 720년에 쓰여져, 연도가 정확할 수가 없을 수도 있다하여 몇 십 년을 앞뒤로 왔다갔다하여 재위 년도를 아무리 맞추어 보아도 최소, 최대의 재위기간이 틀리니 비슷하게도 맞출 연도를 도저히 찾아 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의 기록과 일본의 기록 중 어느 하나는 틀림없이 틀린 것이 되어야한다.
그런데 일본인들도 중국의 기록이 틀리다고 주장을 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그러면 『일본서기』나 『고사기』는 소설일 수밖에 없겠는데….
이의 판단은 전적으로 일본 역사학자들의 손에 달려 있지만, 허나 그들은 올바른 판단보다는 억지에 매달려 아직도 거짓의 세계에서 헤매는 것 같다. 그들의 고등학생용 일본사 참고서의 내용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꼭 같이 왜5왕과 일본사서 중의 다섯 왕을 비견하고 있다. 그리고 메이지(明治) 신궁의 보물전에 걸려 있는 왕의 인물그림 밑에 쓰인 내용을 보면 윤공(允恭)이 제(濟)이며 안강(安康)이 흥(興)이라 적혀 있다. 나는 이 보물전에서 나열된 그림을 보면서 절로 코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왜냐 구요. 그 이유는 극비다.
일본사서인 『일본서기』나 『고사기』가 아주 엉터리가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 기록들이 오오사카 근방에 있던 왕을 중심으로 기록되었으며 또 이들이 옮겨올 때 거쳐 온 곳의 사건도 담고, 또 오오사카 지방에 모인 여러 중심 세력의 역사가 섞이어 쓰여졌을 수도 있기에 말이다. 그렇다면 이 역사서 들을 잘 풀기만 한다면 진실된 역사를 얼마든지 찾아낼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나는 좀 색다른 주장을 하고 싶다.
중국에 유사를 보내고 6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으로 책봉되기를 원했던 왜국왕의 세력은 오오사카 지방보다는 규슈의 내륙 지방에 있지 않았나 본다. 임나일본부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김해지방의 「맏나」가 400년에 고구려에 크게 패했을 때, 일부는 낙동강을 거슬러 내륙인 고령에 자리잡고, 그 일부는 일본 쪽으로 옮겼을 것이라 하였다.
만약에 그렇다하면 준비 없이 떠난 피난길이 오오사카까지의 먼길이 아니라 가까운 규슈까지로 되어야 더 타당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혹시나 무서운 고구려가 뒤쫓아올까 무서워 바닷가보다는 내륙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태백일사』의 고구려국 본기를 보면 구주지방에 「구사환국(狗邪桓國)」 즉 김해지방에 있었던 남동쪽의 한이라는 의미의 개새한국(구사한국 ; 狗邪韓國)과 같은 이름의 나라가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또 발해국 역사인 『대진국본기(大震國本紀)』에 보면 구주의 몇 나라를 설명하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쓰여 있다. 「왜인이 산과 섬에 흩어져 사는 나라가 백여개나 되었다. 그 중에 구사한국(狗邪韓國)이 가장 컸는데 본래 구사본국(狗邪本國) 사람이 다스리던 곳이다.」 이와 같은 옛 글을 볼 때 김해지방에서 옮겨 온 것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자리를 잡고서는 김해지방에서부터 교역의 중심지로 일찍이 익힌 외교술과 조선술로 꼭 같은 피난족 신세인 남중국의 진, 송, 제, 양에 사신을 보내고 옛날 맏이 나라의 영광을 재현해 보고자 이름만이라도 6국의 지배자임을 자칭하지는 않았겠는가.
478년 왜의 무(武)왕이 송의 순제(順帝)에게 보낸 편지에 동으로 55국, 서로 66국 그리고 바다건너 북으로 95국을 정복하였다 하는데 여기서 바다건너 북쪽(海北)은, 일본의 중심 섬인 본 섬의 서쪽으로 보아야 더 타당한 것 같다. 내가 떡 놓아라 대추 놓아라 할 처지도 되지 못하면서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고 있다 하지는 않겠는지….
일본 사학자들은『송서』『남제서』『양서』의 왜국전에서 왜왕이 한반도의 상당부분을 영유하였기에 이에 따라 6국의 지배가 인정되는 칭호를 받았다고 강변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학자들은 중국사서에 실린 내용은 실제의 영유권과는 하나도 상관없다고 하고 있다. 그 예로 실제와는 달리 고구려왕이 영주(營州:대능하방면), 평주(平州) 지역에 걸친 군사권을 가질 수 있는 도독제군사(都督諸軍事)의 칭호를 받고 있거니와, 백제의 중신들이 남제(南濟)의 판도밖에 있는 북중국의 여러 곳에 해당되는 지역의 「태수(太守)」 칭호를 남중국 나라들로부터 받았다한다.
따라서 어느 나라의 지배자에게 자국영토 밖의 지역에 관련시켜 중국의 왕으로부터 어떤 칭호를 허락 받았다고 해서 실제로 그 지역을 다스렸다는 것은 아니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장용학 선생은 찬, 진, 제, 흥 및 무는 역사서에 나오는 여러 왜인의 이름과는 성격이 전혀 다르며, 그것은 소리를 따서 쓴 것도 아니고 한 글자로 된 우리 삼국시대의 이름으로 보아야 한다하였다.
즉 백제왕의 이름은 한 글자로 되어 있고, 사서 같은 데에서는 왕의 성(姓)을 생략해서 쓰지 않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고 하였다.
내가 주제넘게 왜5왕 시대의 왜국을 구주에 놓고, 맏나의 이주민들이 세운 나라로 보았다. 허나 이것이 꼭 옳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렇다고 일본 사학자들이 보듯이 규슈 지역의 왜국을 놓고, 아마도 오오사카 지역의 기록인 『일본서기』의 기록에 꿰 맞추려는 것은 더욱더 어리석은 짓으로 보인다.
일본인들은 한국의 역사를 끌어들여 어떻게든 우위에 선 역사기술에만 매달리지 말고, 이제는 순수하게 일본의 역사만을 떼어내, 있는 그대로의 일본 역사를 바라볼 필요가 있지 않나 한다. 우리도 왜 5왕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기록에 중심부에 속하기 때문이다. 즉 왜 5왕의 역사성이 명확하게 밝혀진다면 임나일본부의 진실이 쉽게 밝혀질 것이다

8. 9백여 번 침략
우리들은 일본에 의해서 36년의 식민 통치를 받는 동안에 일인들이 심어놓은 식민사관에 의해 우리의 역사를 바라보는 경향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 같은 식민사관에 의해 우리의 역사를 바라볼 때 정확히 볼 수 있으리라는 것은 아예 기대할 수가 없겠다. 이제 해방이 된 지도 어언 50년이 넘었으니 우리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를 바라볼 때가 되었는데도….
자칭 타칭으로 지식인 입네 하는 사람들은 강연이나 글 속에서 우리의 선조들이 이 나라를 지금까지 지켜 왔거나 위기를 극복하였던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900여 번의 외침에도 끄떡없이…' '끝도 없는 외세의 침략을 이겨내 온 민족으로서…' '수많은 외침을 받아 많은 핍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이어 나오지 않았는가. 그러니 지금의 이 어려움에도 꿋꿋하게…' 와 같은 말들을 스스럼없이 말하거나 써 왔다.
나는 이런 말투에 거부감을 느껴서 그런지 몰라도 정말로 지겹도록 듣고 읽었다.
끈기 있는 민족을 강조하기보다는 오히려 남의 침략이나 수 없이 받아야할 만큼 나약한 민족이었음을 나타내기 위한 위의 말들은 누가 처음 썼을까. 식민지시대를 살아오며 나약할 대로 나약해진 일제시대의 우리 조상들이 쓰기 시작했을까.
이것은 「나의 민족은 나약할 대로 나약한 민족에 지나지 않는다」고, 우리 민족 스스로가 체면에 걸리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 낸 일본인들의 술책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한다. 기가 살아있는 민족은 제 마음대로 주무를 수가 없을 테니 기를 확 꺾어 놓아 이 민족을 떡 주무르듯 주무르고 싶어 만든 이야기라고 밖에 더 볼 수가 없겠기에 말이다.
이런 말을 하면 이렇게 되짚어 말하겠지.
900여 번의 횟수는 만들어낸 것이 아니고, 우리의 역사기록에 있는 것을 정확히 세어서 얻은 숫자라고 말이다.
기원전에 중국의 한과의 싸움으로부터 시작하여 중국과의 사이에는 몇 번의 큰 싸움이 있었다. 그리고 만주지방을 떠나 한반도 내에 정착하고 나서는, 중국과는 거리가 먼 몽고와 만주 지방에서 일어난 유목민의 나라인 원, 금과 청한테는 정말로 치욕적인 패배를 맛보기도 하였다. 또 조총을 앞세우고 임진년에 쳐들어온 왜군과의 싸움은 유쾌한 기억으로 남을 수 없는 전쟁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십여 번 이내의 큰 전쟁을 제외하고, 우리 민족이 다른 나라의 사람들과 싸워 큰 피해를 입었던 싸움은 도대체 어떠 어떠한 전쟁이 있었단 말인가.
아사달, 개아지 아사달, 아비여, 그리고 곰려(고구려)와 중국과의 싸움은 물고 물리는 싸움이었다.
‘그것이 아니고 신라의 역사 기록에 보이는 왜의 침략기사와 고려와 조선시대에 있었던 왜구의 침략도 우리 조상에게는 고통을 주었던 외세의 침략으로 셈을 할 수밖에 없다’고…. 그런데 고대의 왜인이나 중세의 왜구들은 도대체 어떠한 싸움패였나?
대마도나 구주지방 등에 살면서 태풍이나 병충해에 의해 일년농사를 망치면은, 굶다 못해 주린 배를 움켜잡고, 먹을 것을 노략질하였던 단지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밖엔 볼 수가 없는데도 그게 무슨 큰 전쟁이나 되듯이 이 민족을 괴롭힌 하나의 전쟁으로 셈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물론 고려말기와 조선초기에 걸쳐 해안가나 강을 거슬러 올라 배가 닿을 수 있는 곡창지대이면, 노략질을 하도 해 가서 지역마다 성을 쌓아 피난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그러니 집과 들에 남기고 간 곡식과 가축을 많이 빼앗겼을 테이므로 그 피해도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농군에 의한 방어만으론 아니 되어 조정은 선단을 이끌고 대마도 정벌까지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겠다.
그러나 뜬금 없이 나타나서 노략질을 하고 달아나는 왜구를 대항하기는 쉽지가 않았을 것이다. 한 여름 산 계곡에 텐트를 치고 잘 때 갖가지 방법을 다 쓰고서도 어쩔 수 없이 모기에 뜯기듯이 말이다. 우리의 역사 속에 수도 없이 많은 왜인들의 노략질에 편치야 않았겠지만, 국가전체로 보았을 때 왕조의 유지에 영향을 미쳤다거나 지방통치에 혼란을 야기한 적은 한 번도 없지 않았는가 한다. 헌데 우리의 조상들이 몇 백 번의 외침을 받았다고 지금도 뇌까리고 있는 당신은 우리의 역사를 한 번이라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고 묻고 싶다.
또 그 시대를 살았던 옛 조상의 삶을 깊이 들여다 본 적이 있었느냐고도 묻고 싶다.
이제는 일본인들이 심어 놓은 식민사관으로 본 우리의 역사관에서 제발 벗어나서 똑바로 제 역사를 바라보라고 외쳐야 되지 않겠는가?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오 천년 동안 이 땅에서 일어났던 전쟁다운 전쟁은 모두 얼마나 될까. 중국 쪽으로부터의 외침과, 남쪽으로부터의 왜침도 있었고, 또 삼국통일까지 그리고 고려의 건국 때까지 제법 많은 전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수는 다른 나라의 땅에서 일어난 것에 비하면 정말로 별것이 아닐 수가 있는 정도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큰 땅덩이의 중국은 한 왕조가 몇 백년간을 유지한 때가 적고, 대부분이 단명한 왕조로 끝난 경우가 태반이었다. 또 한 왕조가 유지되더라도 곳곳에서는 민란이 일어나 국민들이 큰 고통을 받았음을 중국사를 통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뒷받침해 주는 것으로 중국음식을 들 수가 있다. 중국의 음식은 다양하다고는 하나, 음식을 만드는 방법은 거의 한가지로 볼 수가 있다. 센 불 위에 놓인 큰그릇에서 끓고 있는 기름 속에 음식재료를 집어넣어 익혀 꺼내놓고, 그리고 식어버린 음식을 데워 먹기 위해 뜨거운 액을 부어 먹는 것이 거의 다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요리 방법은 이리저리 쫓기는 사람들이 어디서나 해 먹을 수 있는 요리방법이다.
그리고 일본은 어떠한가. 주먹밥에 생으로 먹는 것이 태반이다. 수저가 없이 쉽게 구할 수 있는 젓가락만으로 먹다보니 국도 홀짝홀짝 마시고 있지 않던가. 물론 일본에도 발효식품이 있긴 있는데 그 중에서 특징적인 것 중의 하나로 「낫도」가 있다. 이것은 콩을 삶아 허기지면 먹으려고 허리에 차고 전쟁터에 나갔는데 싸움에 열중하다보니 먹을 때를 놓쳐버려 찐득찐득하게 발효가 되어 요상한 냄새가 났으나 전쟁 중이라 어쩔 수 없이 먹게 된 것이 「낫도」라는 이야기를 일본인한테 들은 적이 있다.
일본인들이 음식에 모양을 내거나 모양 나게 내놓는 것은 최근의 일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우리의 음식은 어떠한가. 반찬의 상당부분을 발효식품이 차지하고 있다. 만들어 놓고, 며칠을 지내거나 한 해를 넘겨서 먹는 것들이 많다. 그리고 음식을 만들 때에는 어느 것은 삶고, 어느 것은 찌고, 또 어느 것은 굽고, 어느 것은 끓여서 만든다.
이렇게 하려면 얼마나 손이 많이 가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지 잘 알 것이다. 또 밥에는 국이 따라다니고 그래서 큰 수저는 필수였다. 우리의 조상들이 난리가 없이 얼마나 편안하게 살았기에 이 같은 음식문화가 일찍이 뿌리를 내렸을까를 쉽게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만약에 우리의 조상들이 수많은 외침 속에서 고통을 받고 살았다면 이런 음식문화는 전혀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수많은 외침 속에서 이 민족과 국가를 지키기에 연연했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라고 밖에 말할 수가 없다. 잘 먹고 편안하게 살다보니 남을 침략하여 무엇을 빼앗아 볼 생각이 전혀 안 들어서 싸움을 안한 것이지, 우리 조상이 바보천치처럼 못나고 나약해서 싸움을 걸지 않은 것이 아닐 것이다.
고려나 조선중기까지 이 땅에 천만을 왔다갔다하는 정도의 사람들만이 살았기에, 왜구들이 노략질을 해가도 먹고사는 데는 큰 지장을 겪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말에 천연두의 예방 접종과 같은 서양의술이 들어오면서 전염병으로 죽는 어린아이들이 줄어 인구가 급하게 늘어났고, 여기에 덧붙여 일본인들이 무한정의 식량을 일본으로 실어 날라 극심한 식량부족을 겪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일제식민지 시대를 거쳐야만 되었다.
그리고 6.25전쟁으로 인한 황폐화와 기하급수적인 인구폭발로 인해 누구나 보릿고개를 넘기기가 힘들 정도로 배를 굶주려야 하였던 기억을 마치 우리 조상들이 잘 먹고 잘 살았던 옛날에서까지도 꼭 같았을 것으로 생각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이라 할 수밖에 없다.
신라 시대 때 경주에서는 밥을 지을 때가 되어도 굴뚝에서는 연기가 나지 않았다 한다. 밥을 지을 식량이 없어서 그랬을 테니 그 시대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천만에 말씀이다. 밥지을 쌀이 없어서가 아니고, 실은 숯을 써서 밥을 지었기 때문에 굴뚝에서는 연기가 나지 않았다 한다. 지금 가스를 써서 밥을 하면 연기가 나지 안 듯이 말이다. 제발 제 조상들을 우습게 보는 버릇 이제 버릴 때도 지나지 않았나 한다.
조선 말기에 외척들에 의해 옹립된 왕의 통치력은 미약해지고 세도정치에 의존하다보니 탐관오리들이 들끓어 백성들의 살림이 매우 어려웠을 지라도, 그래도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조선을 병합하여 식민지로 한 것이 잘한 일이라고…. 「일본의 식민지 통치는 한국에 좋은 일을 많이 했다. 도로와 철도를 놓았고, 학교를 지었으며, 공장을 지어 근대산업의 기초를 닦았다」라고 지금도 많은 일본 관료들의 입을 통해 이야기가 되고 있다.
일제 때 만든 도로는 확장 등을 통해 지금은 그 흔적이 거의 없도록 바뀌었지만, 철도는 일제 때 만든 노선에서 크게 변화된 것이 없어 지금도 옛날에 놓았던 철도에 미련과 큰 자부심을 느끼나 보다.
그런데 이 철도는 왜 놓게 되었는가? 대한제국의 물류를 원활히 하여 경제발전을 꾀하기 위하여 놓았던 것인가. 그것이 아니고 우리나라와 만주에서 나는 곡식과 광물 등의 자원을 착취하여 제 나라로 빠르게 싣고 가기 위한 방편으로 놓았던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는 일이다.
그리고 소학교를 만들어 서당에서 공부를 하고 있거나, 연령이 차면 학교로 내몰았던 것이 한국의 장래를 위해 신식교육을 시키기 위함이었는가? 그렇지 않고 사리분별력이 낮은 어린이 때부터 교육을 시켜 완전한 일본인으로 만들기를 위해서 한 일이었는가?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있으며 또 앞으로도 무수히 많은 망언들이 일본 지도자라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나올 것이다.
앞서도 밝혔듯이 우리가 일본에 앞선다면 이런 말이 나오지 않을 테고 설사 나온다 하더라도 어떠한 신경도 쓸 필요가 없겠다.
한편으로 이런 지도층의 망언이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에 갖는 우월감에서만이 나온 결과일까.
한번 뒤집어 놓고 보면 우월감보다는 열등감에서 나오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일본이 옛날에 가졌던 역사는 한국의 역사에 비추어 볼 때 너무나도 초라하기에, 이것을 감추어 보겠다고 억지로 떼를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원의 빈국이면서도 섬나라로 언제나 있었듯이 다른 나라들로부터 왕따를 당할 때의 고통과 그리고 역사 이래로 끊이지 않는 지진과 태풍 등의 자연재해에서 오는 극심한 불안감을 숨기기 위해 다른 나라들을 씹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본인들은 대한제국을 천년만년 지배하며 인력과 자원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도록 요리하기 의해 우리 민족을 어디로 몰고 갔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포자기를 하지 않으면 아니 되도록 몰아간, 악랄한 일본인들의 손에 놀아 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지식인들은 어떠한 심정으로 점점 초라해져 가는 자신을 바라보았을까. 일시적으로나마 할 수없이 비굴해져 버린 민족으로 만들어 놓고도 그렇게도 좋은 일을 많이 하였다는 것인가?
일제 때야 어쩔 수없이 식민지적 생각으로 굳어 질 수밖에 없었다지만 지금도 그들이 심어 놓은 수렁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지 않도록, 우리의 상고사와 왜국과의 사이에 있었던 역사 관계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런데도 일본인들이 만든 허구의 역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의 상고사를 어떻게 설명을 하면 믿어질 수가 있겠는가?
물론 정통파 국사학자들이라는 교수들은 환단고기와 단기고사 등과 같은 역사서는 후대에 만들어진 위서이기 때문에 전혀 연구사료가 될 수가 없다고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다. 또 삼국시대의 역사서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고 있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초기의 기록을 무시하려는 사학계의 아주 큰 흐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뿌리는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길러진 확고한 식민사관을 갖고 있는 친일파 사람들이, 해방 후 교수가 되어서도 큰 반성 없이 제 자신만의 자리를 지키는 것에 연연한 것으로부터 자란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하겠다.
일제시대 때의 논문을 버리지 못하고 감싸안고 가려는 교수와 그 그늘을 벗지 못하는 제자들은 아직도 우리 역사를 식민사관 안에 가두려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아무리 자신들이 명확하게 밝힐 수가 없다 하여 수많은 우리의 옛 기록들을 믿을 수 없는 기록으로 치부를 해버리면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통 이해가 가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아무런 고민도 없이 그들이 뱉어내는 엉터리의 사실을 앵무새처럼 따라하면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이도 귀에 거슬릴 뿐이다.